롯데마트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하예리는 브리저튼의 주인공이 됐다

원로 배우 손숙이 황반변성으로 흐릿한 눈을 이끌고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아 브리저튼 시즌 4 전편을 한 번에 몰아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손녀 하예리가 이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주연으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8일 방영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335회에서 하예리는 진행자 유재석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시청자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
소피 백 역 캐스팅 소식은 이미 전 세계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유 퀴즈에서 밝힌 뒷이야기는 스타의 화려한 겉모습 너머에 숨겨진 눈물과 가족의 유대, 그리고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한국계 호주인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조용한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픈 눈으로도 손녀의 무대를 끝까지 지켜본 할머니
이날 방송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의 주인공은 하예리 본인이 아닌 63년 경력의 원로 배우 손숙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전설로 불리는 손숙은 브리저튼 시즌 4 파트 1이 공개된 당일, 전 에피소드를 한 번에 감상했다고 밝혔다. 황반변성으로 시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 화면에 바짝 붙어 몇 시간을 시청한 탓에 허리 통증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튜디오를 웃음으로 채운 건 베드씬에 대한 손숙의 솔직한 반응이었다. 수십 년간 카메라 앞에 선 배우임에도 손녀의 친밀한 장면은 여전히 민망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나도 배우지만, 손녀가 나오는 장면은 그래도 어색하더라고요." 손숙이 솔직하게 털어놓자 스튜디오에는 따뜻한 웃음이 번졌다.
여기에 한 가지 에피소드가 더해져 웃음을 자아냈다. 하예리가 브리저튼 캐스팅 소식을 가족 중 할머니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알렸던 것. 오디션부터 최종 캐스팅까지의 전 과정을 할머니에게 철저히 비밀로 한 사실을 알게 된 손숙이 삐쳤다는 후일담이 전해지면서 시청자의 웃음과 공감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롯데마트에서 걸려온 전화, 24시간 안에 인생을 바꾸다
하예리는 유 퀴즈에서 캐스팅 비화를 생생하게 공개했다. 서울 롯데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에이전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줄리아 퀸 소설 원작의 넷플릭스 시대극 브리저튼을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비디오 오디션 제출 기한은 24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예리는 집에서 여러 장면을 촬영했고, 그중 캐릭터 스토리라인의 핵심인 호수 장면도 포함됐다. 이후 총 3라운드의 오디션이 이어졌는데 모두 자택에서 리모트로 진행됐다. 마지막 테이프를 보낸 뒤 꼬박 일주일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하예리에게 극도의 인내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최종 합격 연락은 서울 강남에서 어머니와 브런치를 하던 중 도착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하예리의 어머니는 기쁨이 너무 벅차 속이 울렁거린다며 바로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1995년 6월 26일 시드니에서 태어난 한국계 호주인 하예리는 14세에 한국으로 건너와 계원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케이트 블란쳇의 모교인 호주 국립연극예술원(NIDA)에서 수학했다. 이런 순간을 꿈꿔온 그에게 브리저튼은 꿈의 실현이었다.
대표성의 무게 앞에서 흘린 눈물
유 퀴즈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은 할리우드에서 아시아인 배우로서 느끼는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하다 하예리가 눈물을 보인 대목이었다. 자신의 연기가 앞으로 서양 엔터테인먼트에서 다른 아시아 배우들에게 문을 열어줄 수도, 닫아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부담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이미 헤일로 시즌 1-2와 듄: 프로페시로 할리우드 이력을 쌓아온 하예리였지만, 브리저튼만큼 거대한 프랜차이즈의 첫 한국인 주연이라는 타이틀은 그 무게가 달랐다. 그는 활동명으로 영어식 이름 없이 "Ye-rin"만 사용한다. 이 선택 자체가 진정성에 대한 그의 신념을 말해준다.
넷플릭스도 같은 방향의 결정을 내렸다. 원작의 소피 베켓이라는 캐릭터명을 소피 백으로 변경해 하예리의 한국 유산을 의도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힘든 가족사로 하녀 생활을 하다 가면무도회에서 지성과 재치로 베네딕트 브리저튼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 인물은 시대극 속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대화의 출발점이 됐다. 시즌 4는 파트 1이 12월 29일, 파트 2가 2월 26일 공개됐다.
스페인 매체 논란, 한국 팬들의 뜨거운 옹호
유 퀴즈 출연은 스페인 매체를 둘러싼 논란의 여파 속에서 이뤄졌다. 해당 매체가 홍보물에 하예리의 얼굴에 워터마크를 씌우고, 공동 출연자들과 함께한 썸네일에서 그를 제외했으며, 이름을 "Yern Ha"로 잘못 표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네티즌의 격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 반발은 한국 관객이 하예리의 성취를 얼마나 깊이 자랑스러워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팬 커뮤니티는 소셜 미디어 전반에 걸쳐 수정을 요구하고, 글로벌 보도에서의 동등한 대우와 역사적 역할에 대한 정당한 인정을 촉구했다. 이 사건은 여전히 존재하는 편견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결집한 팬덤의 힘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3대에 걸친 한국 배우의 계보
유 퀴즈 출연이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세대를 잇는 서사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손숙은 63년간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다. 그리고 손녀 하예리는 한국 배우가 서양 최대 규모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하예리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교감은 대륙과 시대를 초월한 예술적 혈통을 그려냈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 K-pop의 세계적 열풍에 이어, 넷플릭스 최고 인기 프랜차이즈 중 하나에서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은 업계의 지각변동을 확인시켜 준다. 이제 한국 배우는 서양 작품의 조연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에이전트의 전화가 무엇을 가져올지 모른 채 롯데마트 매대 사이를 걷던 젊은 여성에게 브리저튼의 무도회장까지의 여정은 그가 연기한 어떤 장면 못지않게 극적이었다. 그리고 한국 어딘가에서 할머니 손숙은 여전히 화면에 바짝 붙어 손녀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 허리가 아파도 상관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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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rtainment Journalist · KEnterHub
Entertainment journalist focused on Korean music, film, and the global K-Wave. Reports on industry trends, celebrity profiles, and the intersection of Korean pop culture and international aud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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